여행/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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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용추계곡, 상수원이 품은 '비밀의 숲'

 광주의 영산 무등산 장불재 샘골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고산 초원을 지나 도심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용추계곡이라는 숨겨진 비경이 자리한다. 해발 900m 높이에서 시작된 물길은 용추폭포를 거쳐 제2수원지에 머물며 시민들의 소중한 생명수가 된다. 약 4km에 걸쳐 이어지는 이 계곡은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과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무등산 내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을 자랑한다. 특히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연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걷는 내내 태고의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청량한 물소리와 숲의 숨소리가 어우러진 자연의 합창이다. 제2수원지 정문 옆으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발을 들이면 도심의 소음은 어느덧 멀어지고 깊은 산중의 고요함이 온몸을 감싼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풀들이 길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이슬 머금은 풀잎을 헤치며 나아가는 과정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설렘을 준다. 바짓단을 적시는 차가운 감촉과 코끝을 스치는 진한 흙내음은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의 산행 기억을 소환하며 마음의 긴장을 해제시킨다.

 


숲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비로소 계곡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바위틈을 굽이치며 흐르는 물은 곳곳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낮은 단차를 이용해 앙증맞은 폭포들을 빚어낸다.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숲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 작은 물줄기들은 용추계곡만의 깊은 정취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다. 물길의 정점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품은 용추폭포가 자리하는데, 폭포 아래 깊게 패인 소(沼)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계곡을 벗어나면 길은 점차 가팔라지며 숲의 밀도를 높인다. 서늘한 계곡 바람이 땀방울을 식혀줄 무렵, 만연산과 너와나목장 등 여러 갈래길이 만나는 길목에 다다른다. 이곳에서부터 무등산의 상징적인 쉼터인 중머리재까지는 약 400m의 짧지만 가파른 구간이 이어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노래가 지친 산객을 응원한다. 배낭끈을 다시 조여 매고 마지막 오르막을 넘어서면 마침내 시야가 탁 트이는 고개에 서게 된다.

 


해발 617m에 위치한 중머리재는 스님의 머리처럼 둥글고 나무가 없는 넓은 초지로 이루어져 있다. 예부터 광주와 화순을 잇던 옛길의 중심이자 무등산 등반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만남의 광장이다. 이곳에 서면 방금 지나온 안양산과 만연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산행의 성취감을 극대화한다. 매년 새해 첫날이면 수많은 이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이곳은 무등산의 심장부로서 시민들의 희망과 염원을 오랫동안 품어온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두 달여 전 첫발을 뗐던 무돌길 트레킹은 용추계곡의 맑은 물과 중머리재의 시원한 바람을 만나며 절정에 달했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걸어온 여정은 단순히 산을 오르는 행위를 넘어 자연과 교감하며 내면을 정돈하는 시간이 되었다. 무등산은 용추계곡의 원시림과 중머리재의 너른 품을 통해 지친 현대인들에게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산행을 마친 이들의 마음속에는 초록빛 이끼와 맑은 물소리로 기억될 또 하나의 계절이 깊게 새겨졌다.

 

민둥산, 억새 제치고 '여름 돌리네' 열풍

탁 트인 초록빛 들판이 펼쳐지는 풍경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젊은 층의 감성을 자극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과거에는 황금빛 억새가 일렁이는 가을이 제철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선명한 푸른색이 화폭처럼 펼쳐지는 여름 풍경이 민둥산의 진정한 매력으로 꼽힌다. 등산 마니아뿐만 아니라 2030 세대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매 주말 정상을 가득 메우며 민둥산은 계절을 잊은 명소로 거듭났다.민둥산이 이름처럼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이 된 배경에는 척박했던 화전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려 있다.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주민들은 산에 불을 놓아 경작지를 만들고 곤드레 같은 나물을 재배하며 삶을 일구었다. 1968년 화전이 금지되기 전까지 매년 반복된 화전 작업으로 인해 나무가 자랄 틈이 없었던 자리에 억새가 뿌리를 내리며 지금의 독특한 풍광이 완성되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의 흔적이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전 국민이 사랑하는 이국적인 초원으로 변모한 셈이다.여름 민둥산의 인기를 견인하는 일등 공신은 단연 정상 부근의 '돌리네 연못'이다. 능선 한가운데가 폭격을 맞은 듯 움푹 파인 이 지형은 석회암 지반이 빗물과 지하수에 녹아내리며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의 일종이다. 마치 산 정상에 박힌 푸른 보석 같은 이 연못은 억새밭을 넘어 민둥산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특히 비가 자주 내리는 여름철에는 연못에 물이 가득 차올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건조한 가을철에는 보기 힘든 여름 산행만의 특권으로 여겨진다.지질학적 특성상 물을 머금지 못하는 석회암 지대는 과거 화전민들에게는 원망스러운 땅이었으나, 현재는 지역 경제를 살리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돌리네 연못은 용출수가 아닌 순수하게 빗물이 고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강수량에 따라 그 모습이 시시각각 변한다. 물이 마른 돌리네는 다소 삭막한 느낌을 주지만, 수량이 풍부한 여름에는 초록 들판과 대비되는 짙은 물빛이 조화를 이루며 완벽한 비경을 선사한다. 이러한 희소성 덕분에 등산객들은 기상 상황을 체크하며 물이 찬 돌리네를 보기 위해 민둥산을 찾는다.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 민둥산의 열기는 과거 억새 축제 기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뜨겁다. 별다른 지역 행사가 없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등산로 입구부터 정상까지 인파가 줄을 잇고 있다. SNS상에서 '여름이 가기 전 반드시 올라야 할 산'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민둥산은 관악산이나 북한산 같은 도심 명산을 제치고 가장 트렌디한 산행지로 등극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돌리네 연못을 배경으로 찍는 인증샷은 이제 등산객들 사이에서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자리 잡았다.결국 민둥산의 진가는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을 모두 경험해야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살랑이는 억새가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준다면, 여름의 민둥산은 생동감 넘치는 초록의 에너지와 돌리네 연못의 신비로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빗물이 빚어낸 자연의 화룡점정인 돌리네 연못과 끝없이 펼쳐진 초록 융단은 민둥산을 단순한 등산 코스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자연 갤러리로 만들었다. 여름 들판의 강렬함과 연못의 고요함이 공존하는 민둥산의 여름은 가을 못지않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